삶은 계란과 소주 한 병의 추억
추운 날 일찍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노라면 출출하니 주전부리가 생각나는 모양입니다. 누가 시골 사람 아니랄까 봐 우리 그이 식성은 참으로 촌스럽습니다. 생뚱맞게 생무를 깎아 오라고 하지 않나 내일은 장에 가서 커다란 고구마를 사 오라네요. 밖에서 살짝 얼린 다음 깎아 먹는다고요.
어제 저녁에도 어김없이 간식시간이 되었고 무얼 내갈까 고민하던 끝에 계란 한 줄을 삶아 콜라와 함께 내갔습니다. 뽀얀 속살이 드러난 말랑말랑한 계란을 들이미니 남편이 갑자기 “나 이거 안 먹을란다. 너나 실컷 먹어라”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니 옆에 있는 딸에게 “혜진아! 너는 눈물 젖은 빵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눈물 젖은 계란이라는 말은 들어봤니?” 하더군요. 그제야 남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습니다.
철부지 어린 나이의 순진한 촌색시가 눈동자가 선량한 남편을 만나 부모형제 다 버리고 보따리를 샀습니다. 우리는 언덕배기 지하 단칸방에서 춥고 배고픈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만삭이 다 되도록 식당에서 일을 했고, 남편은 연탄배달을 했습니다. 저녁이면 얼굴에 온통 시커먼 칠을 한 남편은 만삭의 어린 각시가 못내 안쓰러워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시커멓게 연탄 검정이 묻어 반질거리는 작업복 안 주머니에서 꺼낸 계란 한 줄과 소주 한 병. 계란 삶을 곳이 없어 내가 일하는 식당에서 휴대용 버너와 주전자, 왕소금을 챙겨 온 남편은 씨익 웃었죠. 당시 일하는 곳에서 식사를 해결하던 우리는 살림이라곤 고작 이불과 베개 두 개, 세숫대야가 전부였습니다. 그런 만찬은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이어졌고 한 병의 소주를 곁들이며 하루의 피곤을 달래곤 했지요.
이십여 년 전 이제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았지만 남편은 그 뒤로 계란이 싫어졌다고 합니다. 나 역시 계란만 보면 코끝이 찡할 때가 있었는데 남편 또한 그랬구나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계란 장조림에 소주 한 잔 걸치며 남편과 작은 파티를 열까 합니다.
김경순 님 | 충북 옥천군 지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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